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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32년 전 화성연쇄살인 용의자 붙잡았지만…'증거부족'으로 놔줘 - 한겨레

경찰, 32년 전 화성연쇄살인 용의자 붙잡았지만…'증거부족'으로 놔줘 - 한겨레

87년 6차 사건직후 “유력한 용의자 있다”고 보고
현장 확보한 증거물과 대조해 볼 방법 없어 놔줘”
당시 수사경찰 “용의자 너무 많고 과학수사 한계”
1988년 9월7일 일어난 7차 화성연쇄살인 사건 당시 경찰이 뿌린 범인 몽타주. <연합뉴스>
1988년 9월7일 일어난 7차 화성연쇄살인 사건 당시 경찰이 뿌린 범인 몽타주. 연합뉴스>
화성연쇄살인 가운데 5·7·9차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특정된 이아무개(56)씨는 6차 사건 발생 직후 용의자로 지목돼 경찰 수사를 받았던 것으로 확인됐다. 앞서 경찰은 지난 23일 기자들에게 “이씨가 화성 사건 수사가 한창이었을 당시 이씨가 용의선상에 올라 경찰 조사를 받은 기록이 있다”고 밝힌 바 있다. 25일 경기남부지방경찰청의 말을 종합하면, 1987년 5월2일 밤 11시께 경기도 화성시 태안읍 진안리의 한 야산에서 박아무개(당시 29살)씨가 성폭행당하고 살해된 채 발견됐다. 이른바 화성연쇄살인 6차 사건이다. 사건 발생 장소는 이씨 살던 집에서 반경 3㎞ 안에 있는 곳이다. 수사에 나선 경찰은 탐문과 주민 진술, 행적 조사 등을 통해 이씨를 용의자로 지목했다. 이어 당시 수사 지휘부에 “유력한 용의자로 보이는 인물이 있다”고 보고까지 한 것으로 확인됐다. 그러나 경찰은 며칠 뒤 이씨를 수사 선상에서 제외됐다. 당시 과학수사 기술로는 6차 사건 현장에서 확보한 체액 등 증거물이 이씨와 일치하는지를 확인할 길이 없었던 탓이다. 또 6차 이전 사건에서 확보한 증거물을 통해 추정한 용의자의 혈액형(B형)이 이씨의 혈액형(O형)과 달랐고 발자국도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당시에는 증거물에서 디엔에이(DNA)를 검출해 분석하는 기술이 도입되기 전이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이 기술을 수사에 처음 도입한 시기는 1991년 8월로 마지막 10차 사건이 발생한 지 4개월이 지난 뒤였다. 경찰은 이후 8차(1988년 9월16일) 사건과 10차(1991년 4월3일) 사건이 일어난 뒤에도 이씨를 불러 조사했지만, 8차 사건은 모방범죄로 범인이 확인돼 붙잡혔고, 10차 사건에서도 별다른 결론을 내지 못했다. 그러나 이씨는 10차 화성 사건 이후 2년 9개월이 지난 1994년 1월 충북 청주에서 처제를 성폭행하고 살해한 혐의로 검거됐다. 이와 관련해 당시 수사팀이었던 한 퇴직 경찰관은 “당시 용의자로 지목돼 수사를 받은 사람이 워낙 많았고, 범인으로 몰려 붙잡혔다 진술을 번복하는 일도 허다 해 여러 사람이 풀려나는 등 곡절이 많았다. 수사에 한계가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말했다. 한편, 화성연쇄살인 사건 해결을 위해 동원된 경찰은 연인원 205만여명이고, 수사대상자는 2만1280명, 용의자는 3천명에 달했다. 이 과정에서 3차례 경찰조사를 받았던 ㅊ(당시 38살)씨는 1990년 3월 열차에 뛰어들어 목숨을 끊었다. 또 1991년 4월 10차 사건 용의자였던 ㅈ(당시 32살)씨 역시 아파트 4층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7차 사건 용의자로 몰렸다 풀려난 ㅂ씨도 아버지 무덤 근처에서 극단적 선택을 했다. 이밖에 4차와 5차 사건 범인으로 몰려 경찰에서 고문 등 강압수사를 받은 김아무개씨는 후유증에 시달리다 1997년 스스로 생을 내려놓는 등 2차 피해도 속출했다. 김기성 기자 player00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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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5 06:45:45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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