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한국당이 29일 국회 본회의에 부의된 비쟁점 안건 199건에 대해 국회 의사과에 필리버스터(filibuster·무제한 토론을 통한 합법적 의사진행 방해)를 신청하면서 정국이 다시 한 번 얼어붙었다.
필리버스터는 특정 안건에 대해 장시간 발언하면서 표결을 지연시키거나 막는 합법적 표결 저지수단이다. 2016년 2월 테러방지법을 놓고 당시 야당이던 더불어민주당이 필리버스터를 8일간 진행한 적이 있다.
이인영 민주당 원내대표가 국회의장실에서 문희상 의장과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오신환 바른미래당 원내대표와 1시간여 회동을 가졌지만 본회의와 관련해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민주당은 곧바로 국회 본청 본회의장 앞 계단에서 ‘민생파괴! 국회파괴! 자유한국당 규탄대회’를 열고 한국당에 맹공을 퍼부었다. 이해찬 대표는 격앙된 목소리로 “30년 정치를 했는데 이런 꼴은 처음 본다”며 “본회의에서 처리할 200여개 안건 모두에 필리버스터를 하겠다는 이게 상식적으로 말이 된단 말이냐”고 비판했다.
반면 한국당은 본회의 개의를 독촉했지만 여당은 물론 문희상 국회의장도 개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국회법 73조에 따르면 본회의는 재적의원 5분의 1 이상(현 의석수 기준 59명)이 출석하면 개의할 수 있다. 하지만 안건을 의결하려면 재적의원의 과반(현 의석수 기준 148명)이 출석해야 한다. 과반이 되지 않으면 본회의를 개의해도 안건을 표결에 부칠 수 없다는 얘기다. 이 때문에 국회의장은 통상 재적의원의 과반(현 의석수 기준 148명)이 출석해야 본회의를 개의한다. 현재 민주당은 129석, 한국당은 108석으로 어느 당도 단독으로 본회의 진행을 강행할 수 없다.
결국 오후 9시 나경원 원내대표는 의원들에게 “본회의장에서 이석해도 좋다”고 했다. 이어 “오늘 필리버스터 투쟁은 민주당과 국회의장의 터무니 없는 방해로 이뤄지지 못했지만, 국회 내에서 할 수 있는 모든 합법적 투쟁은 이제 시작”이라고 말했다.
여당은 본회의를 왜 무산시켰나
본회의가 열리면 법안이 상정되는데, 한국당이 미리 신청한 필리버스터에 돌입할 경우 법안마다 최소 24시간 동안 무제한 토론을 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당은 이날 본회의에서 처리하려고 했던 199건의 법안에 필리버스터를 신청했다. 이론상 본회의가 열리면 한국당은 199일(199건X24시간) 동안 필리버스터를 통해 표결을 막을 수 있는 셈이다. 단 회기 내인 경우다. 정기국회가 10일까지므로, 이번 필리버스터 효력은 10일까지만 미친다.
사실 자동으로 상정되는 내년도 예산안 때문에 나흘 뒤인 다음 달 2일 본회의가 잡혀있긴 하다. 필리버스터의 대상이 아닌 예산안과 예산안 부수법안은 처리할 수 있다.
민주당이 한국당의 필리버스터에 응한다해도 ‘타격’이 제한적일 수 있다는 얘기다. 여권이 공들여 온 공직선거법 개정안,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법, 검·경 수사권 조정안(검찰청법·형사소송법 개정안) 등 패스트트랙(신속안건처리)에 올린 주요 법안을 포함한 쟁점 법안의 표결 기회를 잃게 되는 정도다.
그런데도 여권이 이날 불응하고 본회의를 무산시킨 걸 두고 정치권에선 “여당이 당황했기 때문”이란 분석이 나온다. 199건의 안건 필리버스터란 초유의 카드를 어떻게 봐야할지 계산이 안 섰기 때문이란 것이다. 이날 무산시키더라도 2일 본회의 일정이 잡혀있다는 점도 고려했을 것이라고 한다.
필리버스터로 표결을 막았던 법안은 다음 회기에선 필리버스터를 할 수 없다. 표결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2일 예산안 때문에 본회의가 열렸는데 한국당에서 유치원 3법에 대해 필리버스터를 진행한다면 정기국회 종료 후 임시국회를 열어 표결 처리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임시국회는 ‘재적의원 4분의 1 이상’이 요구할 경우 열 수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4분의 1을 훌쩍 넘는 129석이다. 관례상 교섭단체 간 합의가 중요하지만 설령 합의되지 않더라도 국회의장은 협의가 안 될 시 일정을 잠정적으로 결정할 권한을 갖는다(국회법 76조 3항).
한편 한국당이 이날 필리버스터를 걸어놓은 법안에는 공직선거법 개정안,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법, 검·경 수사권 조정안(검찰청법·형사소송법 개정안) 등은 포함되지 않았다. 공직선거법 개정안은 선거구제 개편을 놓고 아직 협상이 진행 중이고, 나머지 법안들은 패스트트랙 절차에 따라 다음 달 3일 자동으로 부의될 예정이다. 국회 관계자는 “이론상으로는 국회의장이 본회의 기간 중 직권상정해 표결에 붙이는 것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한편 나 원내대표 측은 문희상 국회의장에게 직권상정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5개 법안 정도만 필리버스터를 허용해주면 다른 법안에 대해선 필리버스터를 풀겠다고 제안했지만 여당에선 이를 거부했다고 한다. 나 원내대표는 5개 법안이 무엇인지는 공개하지 않았다.
한국당, "패스트트랙 법안도 필리버스터 신청할 것"
한국당 측은 “문희상 국회의장이 직권상정 여부에 대해 명확한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며 패스트트랙 법안들에 대해서도 다음주초 필리버스터를 추가로 신청할 예정이다. 따라서 정기국회를 마칠 때까지 해당 법안들은 표결이 어려울 가능성이 커졌다.
여당 측은 필리버스터의 대상이 아닌 예산안과 예산안 부수법안을 최대한 활용하겠다는 계획이지만 선거법 개정안이나 공수처 설치법 등은 예산안과 연동하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다만 이날 민생법안이 처리되지 않은 데 대해선 여야 모두 부담을 느끼는 만큼 다음 달 2일 예산안 처리를 위한 본회의가 열렸을 때 일부 법안들은 처리될 가능성이 높다. 한국당 원내지도부 측도 “‘민식이법’은 빨리 처리되어야 한다. 막을 생각이 전혀 없다”고 강조했다.
여야가 합의하면 예산안과 민생법안을 먼저 처리하고 나머지 법안을 놓고 한국당이 필리버스터를 진행하는 방안도 거론되고 있다.
‘민식이법’ 등 민생법안 책임 공방
이날 본회의가 파행되면서 어린이 교통안전 강화를 위한 ‘민식이법’ 등 민생법안까지 막혀버린 것을 두고 서로 책임을 떠넘겼다.
포문은 민주당이 먼저 열었다. 이인영 원내대표는 “유치원 3법이 어떻게 필리버스터 대상이고, ‘민식이법’이 어떻게 필리버스터 대상이며, 데이터3법이 어떻게 필리버스터 대상일 수 있느냐”며 “한국당은 오늘 스스로 무덤을 팠다”고 비판했다. 이날 법안이 통과되는 줄 알고 국회를 찾았던 김민식군의 부모 등도 한국당 원내대표실 밖에서 “민식이가 협상조건이냐”며 오열했다.
하지만 한국당의 입장은 다르다. 나경원 원내대표는 이날 오후 기자회견을 열고 “한국당이 필리버스터를 신청한 안건 중에 ‘민식이법’은 해당되지 않는다”며 “본회의를 열지 않고 있는 국회의장과 민주당이 ‘민식이법’ 처리를 막고 있다”고 반박했다. 나 원내대표는 “본회의를 열면 ‘민식이법’부터 우선 처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국당이 필리버스터를 신청한 법안은 28일까지 상임위를 통과한 법안이었기 때문에 29일 본회의 직전 법사위를 통과한 ‘민식이법’은 해당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 오신환 바른미래당 원내대표도 “(나 원내대표가) ‘민식이법’을 포함한 어린이교통안전법안과 ‘유치원3법’ 등을 먼저 처리하자고 제안하는 것을 들었다”며 “반면 민주당은 필리버스터 전체를 해제하지 않으면 개의하기 어렵다는 입장이었다”고 전했다.
유성운·하준호 기자 pirate@joongang.co.kr
2019-11-29 11:25:36Z
https://news.google.com/__i/rss/rd/articles/CBMiJ2h0dHBzOi8vbmV3cy5qb2lucy5jb20vYXJ0aWNsZS8yMzY0NTMxONIBK2h0dHBzOi8vbW5ld3Muam9pbnMuY29tL2FtcGFydGljbGUvMjM2NDUzMTg?oc=5
Bagikan Berita Ini
0 Response to "필리버스터 '타격' 약한데 본회의 무산…"민주당 당황했다" - 중앙일보 - 중앙일보"
Post a Comment